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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맥스소프트

죽은 소프트웨어의 나라

한국, 소프트웨어 세계 100대기업 한곳도 없어
불법복제율 43% '체감가격 제로'… 인재들 외면
'최저가 낙찰방식'에 업체도 인건비 맞추기 급급

조형래 기자 hrcho@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정진영 기자 cy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례 1. 경찰은 작년 5월 남대문 화재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서울의 한 구청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다가 깜짝 놀랐다. 무려 구청 내 1300여대의 PC에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던 것. 이 구청은 정품을 사용하겠다고 해당 소프트웨어 업체와 합의해 고소는 면했지만 무심코 복제 프로그램을 썼다가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사례 2. 한 국내 중소업체가 스페인의 유명 차트 관리프로그램을 무단 이용해 만든 소프트웨어에 정부가 인증(GS·굿소프트웨어) 마크를 부여하는 황당한 사건도 있었다. 국내의 대형 IT 서비스 업체들이 정부 인증만 믿고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다가 줄줄이 스페인 업체로부터 저작권 침해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게다가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IT 시스템 발주 때도 '1원 낙찰' '100원 낙찰' 같은 노예 계약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이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IT분야뿐 아니라 금융·자동차·조선·중공업·화학 등 전 산업에 걸쳐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은 아직 '전산실' 수준이다. 이석채 KT 사장이 "한국은 휴대폰이나 메모리반도체 같은 'T' 분야는 강하지만 'I(정보)' 분야인 소프트웨어는 글로벌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고 개탄할 정도다.

해외에서는 소프트웨어 기술이 휴대폰이나 자동차 같은 하드웨어 제품의 혁신을 이끌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이 대표적이다. 애플은 터치스크린 입력방식(화면을 눌러 휴대폰을 조작하는 것)이나 통신 기술 등 이미 개발돼 있는 각각의 기술을 뛰어난 소프트웨어로 통합해 세계 최고의 혁신제품을 만들었다. 휴대폰 제조는 대만 기업에 맡기고 있지만 아무 문제가 없다.

세계적인 자동차회사인 BMW도 자동차 혁신의 90%를 소프트웨어로 달성하고 있다. LCD TV·항공기·휴대폰·의료기기 등 다른 첨단 분야에서도 제품개발 원가에서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다.

하지만 한국은 'IT 강국'이라는 명성과 달리 소프트웨어 분야는 크게 뒤처져 있다. IT 시장조사기관 IDC에 따르면, 한국 소프트웨어 기업 중 세계 100대 기업에 드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안프로그램 업체인 안철수연구소가 319위,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인 티맥스소프트가 370위에 오른 게 고작이다. 또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국내 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현재 1.1%에 불과하다.

우수 인재들도 소프트웨어 분야를 외면하고 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부의 경우, 정원이 최근 3~4년 만에 절반 수준인 42명으로 줄었다. KAIST 등 다른 유명대학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뛰어난 졸업생들은 로스쿨 등 다른 분야로 진출하려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 산업에 대한 인식 부족과 여전히 최저가 낙찰 방식에 의존하는 낙후된 사업구조가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정부 발주 사업자 선정 때 입찰 가격이 차지하는 비중을 계속 낮추고 있지만, 여전히 가격이 절대적인 요인이라는 것이다. 민간업체들도 마찬가지이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임원은 "정부나 민간기업 할 것 없이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없다 보니, 건설 수주처럼 기술력보다는 인건비를 기준으로 수주 가격을 산정한다"고 말했다. 특히 소프트웨어 인력간 능력 차이를 무조건 경력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고참 직원이 많을수록 수주 금액이 올라가는 황당한 사태까지 빚어진다는 것이다.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의장은 "이런 구조 속에서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재(再)하청을 받아서 일하는 중소업체들은 이익이 거의 안 남는다"며 "중소업체들이 인건비 맞추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뛰어난 인재가 모이고 혁신이 나오겠느냐"고 말했다.

희박한 저작권 의식도 개선 대상이다. 사무용소프트웨어 연합이 작년 전세계 108개국을 대상으로 불법 복제 현황을 조사한 결과, 한국은 불법 복제율이 43%, 피해액은 5억4900만달러(약 75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불법 복제율은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지만 여전히 세계 평균(38%)보다 더 높다. 이 때문에 세계 2위의 게임업체인 액티비전은 지난달 한국 지사를 폐쇄했다.

한국소프트웨어저작권협회의 김지욱 부회장은 "국내 시장에는 사실상 가정용 소프트웨어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불법 복제된 공짜 소프트웨어를 인터넷 공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소프트웨어의 체감(體感) 가격은 언제나 0원"이라고 말했다.


입력 : 2009.01.2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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